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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소설관련 잡담

장르소설 최고의 "명작" VS "인기작" 중국편 [영웅문 / 학사신공]

by 리름 202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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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먼저 '무엇이 명작이고? 무엇이 인기작인가?'에 대해서 간단히 정의해 봅니다.

 

최고의 '명작'은 단순한 인기와 인지도를 넘어 장르소설의 역사와 흐름에 닿아있고, 일반적인 사회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친 작품입니다.

 

최고의 '인기작'은 현재 잘 알려져 있고, 많이 팔렸으며, 단순히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인기가 좋은 작품입니다.

 

다만 해외의 작품이라도, 그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와 인기를 핵심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명작'이든 '인기작'이든 한국 독자들이 그렇게 여기거나 평가한다는 것이지, 그 나라에서 실제로 어떨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중국 장르소설 최고의 명작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영웅문(원제 사조삼부곡, 사조영웅전 등...)'입니다.

 

영웅문은 '사조영웅전'으로 시작해 '신조협려'를 거쳐 '의천도룡기'로 끝나는 '김용(金庸)'작가의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팝콘컬쳐로서의 재미는 물론 작가의 해박한 역사, 문학적 지식과 뿌리 깊은 애국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명작입니다.

 

하지만 영웅문에는 우리들 한국 독자들이 불편해할만한 부분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작품 속에 깊숙이 녹아있는 중국에 대한 애국심과 중국인(한족)에 대한 자부심이 원인이 됩니다.

 

현재 중국의 후안무치한 행태에 비례해서 이런 애국심이, 우리에겐 오히려 같잖고 불쾌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하나의 불편함은 오히려 반대로 우리 한국인들이 이 작품과 작가에게 사과해야 할만한 부분입니다.

 

영웅문은 이 단 하나의 작품만으로 한국 무협 장르의 중흥을 불러왔으며, 한국출판업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잘 팔린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원작자인 김용에게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훔쳐 와서 출판을 해버렸던 것이었죠.

 

물론 현재의 영웅문은 이후에 계약을 제대로 맺은 정식출판본(김영사)이지만, 한국의 문화사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 해적판이라니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조영웅전은 금나라가 대두하며 송나라는 힘을 잃어 망해가는 시대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전통적인 영웅 모험담입니다.

 

주인공 '곽정'은 '지(智)'가 조금 부족할 뿐 그야말로 '인의예지 효제충신'의 교과서 같은 인물이기에, 이야기 속에서 우직하고 올곧게 그야말로 협의와 충의로 가득한 영웅의 풍모를 완성해 나가게 됩니다.

 

반면 신조협려의 '양과'는 곽정과는 대척점에 선, 옛말로 '반골', 지금 말로 '안티 히어로'같은 주인공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양과라는 인물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부모와 근친상간을 일삼는 미친놈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신조협려는 파격적으로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지며, 한 연인의 애절한 사랑을 보여준 로맨스 판타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의천도룡기는 송이 망하고 몽골의 원나라가 중원을 지배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족'이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병기인 '의천검'과 '도룡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 이야기의 핵심에는 애국심보다, 오히려 주인공 '장무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은원과 거기에서 비롯된 갈등에 있습니다.

 

운명, 복수, 그리고 허무함, 이런 면에서 의천도룡기는 삼부작 중에서 흔히 무협이라 부르는 장르의 표준형에 가장 가까운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사신공" / 작가 : 왕위

 

네이버 시리즈 / 2243화 완결 / 선협, 무협, 무한파밍, 추노

 

총점 : 3.6

캐릭터 : 3.5

스토리 : 3.5

세계관 : 4.0

 

원제목은 '범인수선전(凡人修仙传)'으로 이 소설에도 영웅문 정도 까진 아니라도 살짝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뭔가 생각이 있어서 색다른 해외의 장르소설 중에서 좋은 작품을 발굴해 보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국내에서 웹소설 붐이 일면서 '글'이 돈이 되자, 그저 부족한 물량을 채우기 위해서 중국 소설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터뜨린 작품이 바로 이 '학사신공'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물론 대다수의 한국 독자들에겐 이런 시스템적 불편함보다는 문화적 코드 차이 때문에 느껴지는 불편함이 훨씬 크겠지만, 어쨌든 학사신공은 국내에 '선협'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유행시킬 정도로 대박을 치게 됩니다.

 

아마도 당장 생각나는 중국산 웹소설중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선(修仙)의 길은 오로지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 배신과 배신이 꼬리를 물고, 개인으로서는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들이 격돌하는 곳.

 

학사신공은 평범한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한 수선의 길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사실 장르소설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다시피, 자기가 평범하다는 놈이 진짜로 평범한 적은 없었죠.

 

주인공 '한립'은 글의 초반부에 '장천병'이라는 어마어마한 보물을 얻게 되고, 이 기연을 토대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때로는 강자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는 수뿐이 없지만, 수련을 하고, 보물을 얻어 힘을 키워 결국 그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산위에는 하늘이 있듯,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간신히 강자를 넘어서면, 더 큰 강자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는 의지와 끝없는 노력, 그리고 이치를 뒤엎을 수 있을만한 행운의 힘으로 승리하고 살아남아, 수선의 길의 끝까지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중국인들에게 김용의 '사조영웅전'과 '범인수선전'을 같은 위치에 놓고 비교해 보라고 하면,

"세종대왕"과 "이번에 비례대표로 뽑힌 20대 청년 스타 국회의원"을 비교하라는 것처럼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웅문은 중국 입장에서는 장르소설 따위가 아니라 거의 국민문학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용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덩샤오핑은 물론, 저우언라이나 현재의 시진핑을 비롯해 심지어 문화대혁명이라는 희대의 병크를 터뜨렸던 마오쩌둥 본인조차도 김용의 소설을 사랑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도 영웅문과 학사신공을 비교해 보라 하면, 먼저 너무 급이 다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작품으로서의 평가'가 아니라 '이거 한번 읽어 볼레?'라는 추천의 의미로 비교한다면 꽤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영웅문은 개성 넘치고 화려한 캐릭터들과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필체로 펼쳐지는 흥미롭고 기발한 이야기로 팝콘컬쳐적으로만 봐도 뛰어난 작품이긴 합니다만, 더 대단한 점은 중국의 여러 한시들과 명승지들에 대한 유려한 묘사

 

그리고 '한족'에 대한 지부심이 듬뿍 섞여 있는 애국심이 작품 깊숙이 녹아있기 대문입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게 한 30년, 아니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냥 "이야 중국의 따거들도 멋지구나"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몽골의 포악한 금륜법왕의 횡포"속에서 "고통받는 중국인들"의 위치가 애매해졌죠?

 

이 시대에 누가 누굴 괴롭히고, 누가 누구에게 고통받고 있고, 누가 구린지, 말할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이런 소설 외적인 부분이 감상에 막대한 방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사신공은 근 몇 년 동안 봐왔던 무협 관련 장르소설 중에서 가장 재밌게 봤던 소설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이 어떤 부분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소재가 참신해서 재밌다는 부분이네요.

 

독자들로 하여금 비급, 무공, 단약 등 무협적인 배경지식을 활용해서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지 않도록 하면서, 연기기, 축기기, 원영기 등 갖가지 경지나, 요수, 천겁 따위의 신기한 선협특유의 설정을 첨가하는데, 이 밸런스가 절묘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 한립은 '배신은 반드시 응징하지만, 은혜 또한 결코 잊지 않는다.'라는 선도를 걷는 자들 중에선 보기 드문 '인도'를 잊지 않는, 나름 주인공에 걸맞은 인물입니다.

 

2000화가 넘는 장대한 기간 동안 초지일관 그 색을 잃지 않아 소위 '한 따거'라는 별명에 걸맞은 매력적인 인물이죠.

 

작가는 이 매력적인 인물과, 참신한 소재를, 치밀하게 잘 짜인 이야기 속에 끊임없이 새겨 넣습니다.

 

영웅문은 흔히 무협 장르의 조상이라 불리고 있고, 실제로 한국 무협 장르에 있어서 진짜 '조상'이라 불려도 충분할 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입니다.

 

하지만 조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한국의 무협 장르는 끝없이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변화 중입니다.

 

수많은 소재와 소재들이 쏟아지고, 이런 시도 저런 시도, 재미를 이끌어 내기 위한 시도가 계속 되어왔죠.

 

이렇게 지금 이 시대와 독자에게 맞춰서 이미 발전된 소재와 발전된 이야기가 넘쳐나는데, 영웅문이 아무리 대단한 소설이라 한들 굳이 오리지널을 꺼내와서 배우고 참고할 만한 부분이 무엇일까?

라는 부분에는 분명히 의문이 있습니다.

 

솔직히 시간 죽이기로 웹소설을 보려는 사람은 물론이고, 만약 내가 무협 계통 장르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어서 '인풋'을 하려고 하는데 뭘 보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사람에게도 영웅문이 아니라 학사신공을 추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더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든지, 더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든지, 아니면 단순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영웅문을 추천하겠습니다. 이 작품엔 단순한 돈벌이나 시간 죽이기 이상의 지식과 문화와 신념이 새겨져 있으니까요.

 

끝으로 덧붙여서 만약 여러분 중에서 영웅문을 읽어 보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김영사의 정식출판본 영웅문이 아니라, 과거의 불법 해적판인 고려원의 영웅문으로 강력히 추천하겠습니다.

 

해적판 고려원 영웅문은 한시와 중국의 명승지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 삭제된 판본이지만, 번역 자체가 훨씬 부드럽고 역동적으로 잘 되어서 정식판에 비해 소설로서의 재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합니다.

 

가끔 영웅문을 봤는데 이게 뭐가 재밌다고 그러냐?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보면 그분은 김영사의 정식판 영웅문을 읽은 경우가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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