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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판타지

[리리뷰 627번째] 피어클리벤의 금화

by 리름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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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판타지
작가 : 신서로

 


책 소개글

"저는 제가 식용에 적합하다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영주의 딸 울리케 피어클리벤.

바닷가에서 배고픈 용에게 납치당해 한 끼 식사로 잡아먹힐 뻔하지만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반신(半神)의 적생자를 상대로

온 세상을 뒤흔들 교섭을 시작하는데…….

'말빨'과 '티키타카' 가득한 신개념 교섭 판타지!


리뷰

세상은 불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온 세상의 모두가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욕하기 위해서, 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재미로 던진 모든 말과 행동으로 인해 이 세상은 쉼 없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격동과 분노로 불타오르는 세상 속에서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싶은 현대인에게 삶이란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이 아닌 힘겹게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무거운 짐이 된 지 오래지요.

누군가는 힘겨움에 좌절하여 포기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합니다.

사람들은 그 힘겨운 삶의 와중에서도 자신보다 나은 또는 못한 누군가를 보며 부러워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분노합니다.

길 잃은 분노를 쌓아두던 사람들은 결국 폭발했습니다.

억압된 욕망과 어두운 미래와 분통 터지는 현실들이 어우러져 지금의 시대는 어딜 가나 분노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그리고 작가 신서로의 작품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그러한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내면의 '무언가'를 불태운 열기로 금화를 주조하는 자들, 부를 추구하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북방에 위치한 가난한 남작령 영주의 13명의 형제들 중 8번째 영애 '울리케'.

​이 작품의 주인공 울리케는 작고 연약합니다. ​

인간관계도 서투르고 이렇다 할 친구도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서 영지의 부흥을 꿈꾸지만 그 꿈조차 자신이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방황하는 처녀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고향은 정겹고 아늑한 엄마의 품 같은 곳이 아닌,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에서 뒤처져 점점 메말라가는 별 볼 일 없는 시골 영지일 뿐입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다들 고된 노동과 나아질 희망이 없는 현실에 지쳐 생기를 잃었습니다.

세계의 벽은 너무나 높고 냉혹해 보이고, 울리케 자신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절망조차 일상에 매몰되어버려 하루하루 살아가던 어느 날, 울리케는 용에게 한 끼 식사 거리로 간택되어 용의 동굴로 납치되어 옵니다.

피어클리벤의 금화의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 자신의 조력자가 되어준 '빌러디저드'를 통해 희망을 얻은 것도 잠시, 자신의 안식처 속에 이질감 느껴지는 불청객들, '고블린', '류그라', '서리심', '몽골 그 비슷한 뭐시깽이 하는 제국의 군대(이름 잘 기억 안 남)'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관계는 부드럽지만 미묘하고 스산하게 어긋나갑니다.

자신의 현실에서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다른 대체제를 찾아 그것에 집착하며 만족감을 느끼려 하듯이 작품의 등장인물들 또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집착하듯이 얽혀 자신의 내면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며 현실로부터 해소하지 못하는 욕망의 해방을 갈구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은 용들과의 짧은 인연을 진실된 운명이라 생각하며 그들과의 관계에 집착함을 통해 자신의 방황 속에서 길을 찾으려 합니다.

현실의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류그라들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정신적 도피와 용이라는 이질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와의 교류를 통해 이 현실로부터 탈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되는 용들조차도 자신의 완벽하게 반복되는 삶 속의 공허함을 탈피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부'를 불태우는 행위에 집착하지요.

이들의 문제 모두가 자신의 내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방황을 끝내줄 무언가를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찾으려 합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아존중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자 관계를 반복하고 갈구하고 집착합니다.

그것이 비록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하더라도.

그런데 여러분은 이쯤 되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지랄들이 '부'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맞습니다.

이 지랄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부'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요! 그냥 작품 초반 배경 그대로 연약한 영지가 시대의 흐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야기지요.

작품의 주연인 울리케와 빌러디저드는 분명 '부'를 연료로 해서 타오르는 불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삶'을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길인 고블린들, '독립'을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길인 류그라들, '권력'을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길인 외지의 세력들, '안식'을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길인 서리심 등등 온갖 불길들이 울리케와 빌더리저드의 '부'를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길에 합쳐지며 원인과 목적 모두 다른, 통제되지 않아 사방팔방 태울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태워먹으며 그저 타오르기만 할 뿐인 불길, 즉 난잡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글 초반에 이 작품을 '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불타오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소개한 이유입니다.

야인으로 살아가던 고블린을 동맹으로 삼았지만, 어떤 가시적인 처우의 개선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외부인들 또한 여전히 신기한 동물 보는 듯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지요.

가난하게 살아가던 류그라를 영지에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원하는 목적을 얻기 요원해 보입니다.

작품 중반에서는 부족마다 하나씩 내려오는​ 세계수를 재생시키기 위한 지팡이를 싸움 중 부숴먹었어요.

게다가 이 지팡이가 작중 권력자들의 눈에 들며 류그라들은 멸종할 판인데, 주인공들은 몽골제국과 싸우느라 어떻게 대처하지도 못합니다.

용은 이 지랄에도 잠만 자면서 언약을 중개해주는 변호인 일밖에 하지 않습니다.

작품의 이야기는 어떤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가는 굳건한 줄기를 가진 나무의 형태가 아니에요.

그 시대의 흐름이란 이름을 가진 거목 밑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줄기는 없고 가지만 사방팔방 뻗은 작은 덤불의 형태이지요.

햇빛을 받지 못해 크게 자라지 못한, 그럼에도 여전히 거목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살아가는 덤불 말입니다.

이야기는 있는데 서사는 없습니다.

주인공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온갖 이야기의 가지마다 주인공이 따로따로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군상극도 아닙니다.

여전히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주인공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말고 하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작품 내 시대는 격동하며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인 거목은 이미 대륙적인 산불로 타오르는 상태입니다.

그 밑에 있는 덤불도 같이 불타오르지만, 같이 불타오르더라도 두꺼운 줄기를 가진 나무가 더 오래 불타지, 가냘픈 덤불은 나뭇가지가 모두 불타면 끝나버립니다.

작품이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진짜 문제는 그런 전개는 재미가 없다는 거죠.

작품 외적으로 현실적일지언정 작품의 구조 부분에서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이 '혼란'을 연료로 하여 불타오르는 화마를 울리케와 빌더리저드가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가 작가의 과제겠군요.

모두 불타버린 뒤에 용을 이용해 새로운 씨앗을 심을지, 아니면 영웅적으로 화마에 맞서 싸울지가 궁금해집니다.

작품 내적 후기는 대충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그래도 재미있게 봤어요.

버터 두세개 처먹은 남주와 아프리카 하마처럼 사방팔방 똥을 튀기는데 책임은 안 지는 여주가 만연한 현 여주물 중에서도 ​거의 씨가 마른 '중세 판타지 여주물'(그것도 여주가 주도적인!)이었거든요.

작품 내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을지언정 조금 더 발전의 여지가 있는 처녀작이기도 하니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중세판타지 시대 배경 자체가 여성에게 취약한 환경이라 남탕으로 가득 찬 땀내 나는 시장인데도 불구하고 여주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도 자체가 신선해 보였어요.

그래서 트위터에서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여성이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작품이니 뭐니 하는 글을 싼 걸 보자마자 좀 그랬었네요.

작품의 해석은 독자 나름대로지만, 특정 사상을 작품에 대입시키는 것(그것도 '그쪽' 사상)은 작가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니까요.

안 그래도 없어서 못 보는 제대로 된 여주물인데.​

최소한 헤라클레스가 안경 멸치나 파오후를 대변하는 작품은 아니지 않습니까.

작중 서사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주역을 맡고 있습니다.

주역인 울리케부터 시작해 류그라 차기 족장인 시야프리테, 서리심인 뉘르뉴, 권력을 잡기 위해 수도의 이면에 자리 잡은 길드의 수장 등등등...

원래대로라면 단순히 서사적인 개성으로 짚고 넘어갈 만한 문제였으나 작가의 행보로 인해 문제점이 밀려 올라오게 되었어요.

하물며 울리케의 언니인 에인달케의 괴력마저도 작가의 남성 혐오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쓴 걸까요?

정순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자들의 이야기? 아니면 그저 맹목적인 혐오의 정서로 불타오르는 현실을 대입한 걸까요?

작가가 본 사람들의 세상은 이런 모습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던 걸까요?

욕망과 갈등과 분노에 가득 차 서로를 해하고 자신마저 해하며 결국 헤어 나올 길 없는 절망 속에서 불태워지는 그런 모습?

제가 보기에 한국에서 억울한(feel victimized) 사람은 대개 실제 피해자(victim)가 아니에요.

그/그녀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만이 고통받는 사람이라고 자위하면서 자신이 만드는 악(evil)을 합리화하는 인간이지요.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도 그/그녀의 억울한 감정을 해소할 수 없는 거고요.

억울한 이가 모여 사는 한국.

긴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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